북녘땅 천리행
-산재지구 소학교육현장 탐방
림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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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가는 교장과 앓아누운 교원
차창으로 뉘연한 흑토벌이 북으로 북으로 거무슥하게 널려져있는 것이 보인다
마음은 어쩐지 무겁고 착잡하기만 하다
글소리 랑랑하던 우리 민족학교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앞에서 스러져가고 있는듯 하다. 조선족집거구인 연변지역이 학교소실속도가 아주 빠른데 비해 산재지구의 학교들은 어떤 형편인지?
가을이 깊이 물든 지난 10월 24일 저녁녘에야 우리 취재팀은 산재지구조선족소학교육현장을 찾아서 북녘땅천리행의 첫역으로 서란시조선족실험소학교의 대문을 노크하였다.
초겨울에 접어들 준비를 하느라 그런지 그날따라 날씨는 을씨년스럽고 짓눈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가 취재차 찾아간다는 기별을 미리 전달받은 이 학교 김필선교장은 이미 퇴근시간이 다 되였어도 널찍하고 호화로운 교장실에 정히 앉아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김교장은 우리의 취재의도를 유심히 듣더니 덕육부교장, 업무부교장과 유치원원장님까지 학교주요지도부성원들을 몽땅 불러놓고 학교소개와 우리의 여러가지 질문을 일일히 답하였다.
학교는 너무나 좋았다. 지난해 첫학기까지만도 아주 헐망하던 학교를 김교장과 주요 지도부성원들은 앞뒤로 뛰여다니며 손이 발이 되도록 빌다싶이하여 많은 자금을 인입받아왔고 그래도 자금이 모자라자 학교의 부지면적을 더러 팔아가면서까지 총투자 600만원으로 이 호화롭고 현대화적인 교수청사를 새롭게 지어내는데 성공했단다. 부지면적이 1만 8천평에 건평이 5천평인 이 호화청사는 원래의 낡은 교사보다 7백평이나 더 크단다. 그간 김교장은 여러차 눈물까지 흘리면서 학교의 래일을 위해 피땀을 쏟았단다.
우리는 이들의 한숨과 악땀으로 이루어진 학교청사를 일일이 돌아보면서 눈이 부시여 부지런히 카메라 샤타를 눌러댔다.
1936년에 창립된 이 학교는 지난해 후반년부터는 현대적으로 건설되여 최고급 전기화실, 밝고 호화로운 교실, 내부장식이 너무나도 이쁘고 난방설비가 잘되여 있는 기숙사, 꼬맹이들 마음에 꼬옥 들게 꾸며진 아담한 유치원놀이장과 학교음식점…모두가 그렇게도 잘 다음어져 마치도 포근한 부자집에 들어선듯 하였다.
기숙생들은 네분선생님이 친히 보도하는 야간교실에서 숙제공부를 마치고는 넓고 큰 객실에 모여 텔레비도 시청하고 또 4학생씩 취침할수 있게 꾸며진 11개의 침실에서 꿈속에 들어간단다. 침실마다 문어구엔 4명학생의 이름과 채색사진이 꼭꼭 박혀있고 침대마다 학년과 반이 밝혀있었다. 또 저급학년애들을 위해 책임진 선생님이 데리고 자는 칸이 두개나 되여 있어 진짜 개인집 침실과 꼭 같았다. 이들의 빨래는 몽땅 교원들이 해준단다.
헌데 너무도 크고 호화로운 학교청사에 비해 학생이 고작 160여명밖에 안되여 너무나 아쉬웠다…
그날저녁, 우리들속의 류락현부사장과 농학원시절의 동창이고 친구인 서란시 농업국 리국장이며 또 나와 함께 안도현2고중에서 교편을 잡았던 조양진 녀당위서기 주영화며 그들의 남편과 부인들까지 모두 찾아와서 우리를 반기였으며 소학교령도들을몽땅 이끌고 개업한지 한주일밖에 안되는 서란시에서 제일 호화술집에 우리를 초대하여 수년간 서로 얼굴도 못보았던 회포를 풀었고 끈끈한 한민족의 피를 나누면서 학교의 앞날을 진맥해보고 앞으로의 작전을 많이도 담론하였다…
이튿날 우리는 서란시 평안진에 있는 또 다른 학교 서란시 평안진조선족소학교에 찾아갔는데 학교학생은 40명밖에 안되였다. 수십년간 이 지역 촌소로부터 돌며 교편을 잡으면서 우리 소년보사에 많은 원고를 보내주었고 또 서란지구의 꼬마기자들을 많이도 배양해주셨으며 서란지구에 소년보를 많이도 홍보해주신 김룡환선생이 바로 이 학교에 있다는 소식과 또 그 김선생이 페암으로 심하게 앓고있다는 소식을 우리는 이미 신문사에서 떠날때부터 알고 있었던것이다.
우리는 김선생을 꼭 찾아보고 위안의 말이라도 올리고 싶어 덜컹거리는 시골길에 택시를 들이밀었지만 아쉽게도 김선생은 학교에 없었다. 이 학교 현임교장 신명숙(50세)선생의 소개에 의하면 김룡환선생은 암증세가 너무도 엄중하여 3-4개월 심하게앓다가 이미 길림시에 있는 부대병원으로 갔단다…우리는 가슴한구석을 꼭 물어뜯는 아픔을 느끼며 전국에 있는 조선족꼬마독자들을 대표하여 김룡환선생의 건강회복을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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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시의 민족의 요람에서
1934년 3월에 오상충인국민학교란 이름으로 건립된 이 학교에 들어서니 흑룡강성모범교사이고 올해에 4 4세인 이 학교제13대교장 추옥단선생님께서 회의도중 우리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었다. 학교의 연혁으로부터 학생수며 특색활동에 대해서 취재를 펼치는데 김분화부교장, 과학을 책임진 김명화주임, 덕육을 책임진 장미옥주임 등 말짱 젊은 녀교원들이 교장실에 올라와 우리와 일일히 인사를 나누면서 취재를 받아주었다.
교장실옆칸이 바로 그 유명한 “민족문화교실”(제7호)인데 2008년에 오픈한것으로 들어가 보니 마침 고급학년학생들이 저급학년학생들한테 도도리를 배워주고 있었다.
현대화적인 널직한 장소인데 민족무용, 민족례절과 민속 등을 위주로 랑독시합이나 대형행사를 진행할수 있는 좋은 활동실이였다. 지어 떡이나 김치같은 민속음식을 만드는 방법도 여기서 가르친단다.
우리는 이 학교에서 다재다능한 소녀로 소문이 자자한 6학년1반의 정세나를 만났다
올해에 12살인 그애는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지금껏 시종무용을 배웠는데 때로는 두다리가 시큰해나고 어깨마저 부어나 얼음찜질까지 해가면서도 련습을 견지하여 학교선전대일원으로 여러가지 경축대회와 문예경연대회에 참가하게 되였으며 수많은 영예들을 따냈단다.작년 예술절에 그가표현한<<소고춤>>은 할빈시1등상까지 안아왔단다.
그애는 또사회도 곧잘 하는데1학년에 입학하여서부터 지금껏 부반장직무를 맡고있으면서 학급에서 조직하는 주제반회나 활동과를 할 때면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공인하는 인기사회자로 활약하고 있으며 학교에서 주최하는 이야기대회, 노래자랑,
랑독, 랑송대회에도 참가하면모두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지난6월에
있은 할빈시중소학교글짓기경기에서 그애가 쓴 작품<<사진>>은 또한번1등의 영예를 안아왔단다.
그애는 또한 생활의 강자이기도 하단다. 아빠, 엄마가 두살짜리 어린 동생과 그애를
남에게 맡겨놓고 출국하였지만 현실을 정시하고 성격이 명랑하고 배움의 즐거움과 생활의 유쾌함을 즐기면서 살겠다고 마음속으로 굳게굳게 다짐하곤 매일 하학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동생을 보살폈고 집일도 도왔지만 이6년간 학습성적은 시종1, 2등을 다툰단다…
1만 6천평이나 된다는 운동장으로 나와보니 하너른 것이 눈앞이 시원히 트이였다. 건평이 2280평인 이 학교는 시중심에서 좀 나와있어서 환경이 아름답고 록화가 잘돼 있었다. 벌써 한두시간 취재해보니 학교는 각종 시스템이 잘 짜여 있었고 교원대오도 깔끔하고 탄탄함을 직감으로 알수 있었다. 2003년에 새로 지었다는 학교청사는 아직도 너무나 새것 그대로였으나 여러가지 시설들이 굳건히 현대화적으로 짜여들고 있는 시점에 학생수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로 조금 아쉬웠다. 15년전까지만해도 600여명 학생으로 번창했다는 이 학교가 지금은 270명이란다. 270명이면 흑룡강성에서는그래도 꽤 많은 학생수였으나우리 마음은 그냥 서글펐다.
올해 입학생수는 39명으로 그래도 요즘은 학생수가 조금은 온정되여 간단다. 김분화부교장은 말한다. “광휘향중심소학교와 소산자진중심소학교가 합병했다가 2006년에 소실되였습니다. 밀락향중심소학교는 이번 학기에 문을 닫았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에도 어딘가 그늘이 비껴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편 정세나와 같은 재간많고 강직하고 귀여운 학생들이이학교를 빛내주고 추교장을 위수로한 젊고 패기있는 골간들이 있음으로 하여 이 학교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위안도 받아안게 되였으며 마지막까지 산재지구에서 우리 민족소학교육현장을 굳건히 지키는 그들에게 머리숙여 경의를 드렸다.
3.
북방의 모스크바는 마냥 부유하지만…
우리는 흑룡강신문사 정봉길주임의 소개로 100여년의 력사를기 록하고 있는 도리구조선족소학교로 찾아갔다. 언제나와 함께준수하고 깔끔한 모습의 백미옥교장이 우리를 반가이 맞아주었다.
널직하고 호화스런 교장실에서 우리는 이 학교가 부유한 학교임을 인차 감득할수가 있었다. 이날 오후 일본손님들이 학교를방문한다기에 우리는 더는 지체하지않고 다그쳐 취재에 들어갔다.
백교장의 소개에서도 이 학교는 가난티를 벗어메치고 부유의 길로 가고있음이 확연히 알렸다.
우리는 일부러 우리를 위해 준비해놓은듯한 2학년 1반의 꼬맹이들의 주제중대활동도 구경하였다. 화려하게 한복을 차려입은애들이 소선대대기를 들고 중대활동을 펼치는데 주제는 공중례절을 잘 지키자는 것이였다. 너무나 재미나게 부드러운 활동이여서 우리는 연신 샤타를 눌렀다.
활동이 끝난후 우리는 이 학교의 특장생 두애를 불러보았다. 한애는 6학년의 원래는 5학년이여야할 애가 하도 공부가 출중하여 6학년으로 뛰여올랐다는 최중람인데 한족애였다. 그애는 7가지 외국어를 배우고 있었고 전교에서 공부가 계속 1등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미 할빈공업대학 부속중학교입학시험을 보았는데 3천여명의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점수가 도달했단다…
다른애는 5학년 1반의 류지림인데 역시 한족녀자애이고 꼬마무용수였다. 그는 여러차 할빈시중소학생문예경연에서 무용1등을따냈으며 홍타민컵예술경연에서도 1,2등을 따냈었다.
학생수가 168명밖에 안남은 이 학교를 계속 살려내자면 백교장의 방법은 특장생배양과 특색교육의 대폭적인 인입이란다. 도리구는 상업구여서 통근차를 내서 돌아다녀도 학생이 없단다. 1995년까지만도 600여명학생을 용납했던 이 학교가 1998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것이 막을래야 막을수없는 하강세를 그었단다. 올해 입학생수는 23명밖에 안되였단다.
그래서 백교장은 한족학교에서는 진행할래야 할수없는 무용이나 민속례절, 민족체육 등을 틀어쥐여 린근 한족학교의 아이들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우의 두 학생은 성적이 우수하여 이 학교의 홍보역할을 썩 잘해주고 있어 학교립장에서는 아주 보귀한 재부로 된다고 한다…
돈도 있고 학교청사도 그만하면 현대화적인데 고프고 모자란건 역시 학생래원임을 우리는 재차 정시하면서 아쉬운 발걸음을옮겼다…
늘 시간이 급한 우리는 차머리를 돌려 동력구조선족소학교로 질주하였다.
조선말은 잘못하지만 한족말은 한족보다도 더 잘한다는 최명옥교장이 역시 조선말을 잘하는 나젊고 해박한 설금옥주임을 옆에 불러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때는 700-800명의 학생을 용납했다는 이 학교에 들어서니 교장실은 너무나도 크고 호화스러웠다.
최교장은 완전히 미인타입인데 한어말을 너무 잘하는것이 우점이였고 조선말을 잘하지 못하는것이 결함이였다. 우리는 서로명함장을 교류하고 기념촬영도 남기였다.
설주임은 벌써 학교구경부터 시키려는 낌새였다. 우리는 김교장과 설주임의 안내하에 돈내가풍기는 학교의 이모저모를 구경하였다.
진짜 현대화설비에 현대적 시스템이였다. 300-400만원을 투자하여 장식했다는 학교는 모든것이 깔끔하고 고급스럽고 행복의요람이였다. 열람실, 무용연습실, 체육실, 도서관, 소발명실, 전기화교실, 실험실 등이 모두 최고급이였을 뿐만아니라 교원들의 사무실도 독칸이 아니면 많아야 두명씩 정해있는데 책상이나 쏘파나 다가 알른알른한 새것이고 고급적인것이여서 보기만해도마음이 개운해 났다.
1층에 내려가니 이 학교유치원이였는데 유치원에만 140만원을 투자하여장 식했단다. 식당이며 잠자리며 놀이터며 지어위생실까지 모두가 깔끔하였다. 진짜 동화속의 꼬마왕자들과 꼬마공주들이 별장속에서 행복하게 살고있는 모습이였다. 유치원학생수는 그래도 한족학생들을 포함하여 85명으로 상승세를 긋고 있어 다행이였다.
허나 아이들은 우리 말이 잘 안되여 혀를 홀랑 내밀었고 일상용어가 거의가 한어였으며 이번학기 학교1학년 입학수는 27명밖에 되지않아 우리는 돈내풍기는 속에서도 위기감은 버릴수가 없었다…
우리는 이 학교 5학년에서 또 중국무술계의 새별로 떠오른 지홍원이란 남학생을 만났다. 너무나도 잘생기고 건강미가 철철 넘치는 애였는데 무술운동은 너무나 출중하여 전국1등상만도 여러개나 따냈단다. 금박색 무술운동복을 거뜬히 입고 금에달을수두룩히 목에 걸고 량손에 쥐고있는 그의 모습을 나는 기쁜 심정으로 렌즈에 담았다.
이 학교운동장에는 또 너르고 큼직한 호케이장이 있는데 이 학교 호케이팀은 여러차 전국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안아왔단다.
4.
조상지장군의 고향에서
할빈역 남강려객운수잠에서 장도뻐스에 몸을 실은 우리는 10월 27 저녁녘에야 지친 몸을 이끌고 조상지장군의 이름으로 명명한 상지시에도 착했다. 우리는 우리의 목적지인 상지진조선족소학교로 곧추 들이닥쳤다.
학교는 너무나 오래된 건물이였고 모든 것이 이미 색이 날았고 한물지어있었다.
저녁녘 우리의 돌연적인 출연에 이게 웬 홍두깨냐 는듯 구용수교장은 어쩡쩡해 있었다. 우리는 여차여차 자초지종을 말하고 명함장을 교환했으며 수인사를 마쳤다. 새로 갓교장으로 부임된 구교장은 려로에 지친 우리 모습을 인차 감득하고 업무능수이고 오랜 학교령도인 강원옥부교장을 불러 함께“외할머니장국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할빈에서 중국음식에 혼이 떨어진 우리는 완전 연변맛을 돋구는 장국을 훌훌 마시면서 구용수교장의 구수한 창업담을 거의두시간가량 들었다…
시골소학교에서 다년간 교장사업을 했던 구교장은 지금 한창 상지조선족소학교를 꾸리느라 불철주야 로심초사하고 있었다.
이 학교는 관건은 경제가 잘풀리지않아 애타하고 있었다. 학생수는 그래도 유치원까지 합해서 300명정도였는데 경제래원이 희미하였다.
국에서는 학생인수에 따라 돈을 내려보내는데 그걸 가지고는 학교일상지출은 겨우겨우 에때우지만 학교건설은 못한단다.
그래서 구교장은 장사하는 친구들이나 친척, 동창 등 두루 도움이 될만한 사람은 다 찾아서 돈구걸하는 “거러지”신세로 매일매일 고달픈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지난번 교사절에도 수년만에 퇴직로교원들을 모셔다 학교운영에 대해서 회보하고 좌담을 조직했는데 퇴직교원들까지 자기들의 주머니를 털어 3천여원을 내놓더란다.
구교장은 말한다. “학교를 살리자면 민족체육과 민족문화, 예술을 흥기시켜야 합니다. 한족학교의 모식을 따라가서는 안됩니다.”
또 상지시조선족체육계에서는 원로이며 성팀에도 여러 운동원을 수송한 건장이며올해60세인그분, 또 그의
5.
목단강은 고요히 흐르고 민족학교는 파도를 일구고. …
또 새벽이다. 나는 키보드를 두두리다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밖으로 빠져나왔다 도시 잠을 청할수가 없었다 나의 머리속에는 학교운영경비부족으로 이 밤을 설치고 있을 상지조선족소학교구용수교장의 한숨소리가 고패치고 매일 매일 키가자라는 새교사를 두고 잠못들었을 새로 부임된 명국교장의 초조한 얼굴이 자꾸자꾸 떠오른다. 1천만의 투자, 그걸 어떻게 잘 리용하여 보다 보다 현대적이고 보다 질감높은, 오늘의 아이들 특점에 맞는 교육창구를 건설할것인가?
다년간 한족중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해온 박명국교장은 장동권같은 미남형의 교장이였는데 한어고시도 창작하고 말주변도 상당한 패기있고 열정에 넘치는 분이였다.
다년간 한족중학교에서 령도사업을 해온 박명국교장은 장동권같은 미남형의 교장이였는데 한어고시도 창작하고 말주변도 상당한 패기있고 열정에 넘치는 분이였다.
건물외관은 한국모회사에서 설계한 치마저고리색갈을 본딴 민족풍이 짙고 참신한 도면이 10여개도면가운데서 시정부의 긍정을 받았다. 시에서 1천만원을 조달하여 짓는 이 건물때문에 박교장은 매일 잠도 제대로 자지못하면서 발바닥에 불이일 정도로 달아다니고 있었다.
건평이 원래학교보다 1천평은 더 된다는 새교사는 지금 막 시공중에 열기를 띄고 있어 박교장은 많이 흥분해있는 편이였다. 여기저기 자금을 인입하여 요긴한테 들이밀고 교학과 시공을 동시에 틀어쥐다보니 늘 다망했다. 학교건설기간 조선족중학교에 얹혀살면서 8개의 교실을 빌어들고 2부제로 교학하는 그들은 누구라할것없이 드바삐 보내고 있었다.
흑룡강성에서 학생수가 제일 많은 이 학교(목단강조선족소학교)는 560여명의 학생수를 보유하고 있는데 박교장한테는 엄청난수자가 아닐수없다. 다년래 이학교에서는 결손가정애들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않았다. 명절때면 기숙사애들은 서로 함께 단란하게 명절을 쇠고 그중 누구의 생일이면 생일파티를 꼭꼭 차려주어 애들을 두고 출국한 부모들은 많이 안심하고 있단다.
특색활동도 목단강지구에선 으뜸으로 축구, 달리기, 배구등운동은 다년래 전시적으로 계속 앞자리를 보유하고 있고 특히 이학교빙상운동은 전시의 이름난 꽃이란다.
1934년에 건립된 이 학교는 이제 새교수청사에 든후 80돐잔치도 성황리에 맞을것이다.
6.
젊은 교장의 오돌참과 열정
우리는 해빛밝은 녕안시조선족실험소학교 정원에 들어섰다. 어저께 할빈에 회의갔던 김련희교장이 오늘 우리가 학교에 취재를 간다니 밤도와 돌아와 김화주임과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그 머나먼 할빈에서 밤도와 녕안까지 와준 그의소행과 토요일휴식날인데도 우리의 취재를 반가이 접수해주는데 대해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느끼게 되였다.
눈이 크고 이쁘게 생긴 김교장은 너무나 나어린 교장이였다. 31살에 녕안시교육국으로부터 교장으로 부임돼 와서 올해는 34살이란다.
그는 벌써 이몇년간 층층마다 실내위생실을 다 꾸몄고 란간도 교육국이 이사할때 그 낡은 걸 다 가져다 새로 칠해서 가설했고 난방설비도 재빠르게 다 갖춰놓아 올겨울은 따뜻이 보낼수가 있어 전교사생들이 행복해 한단다. 이 학교는 흑룡강성에서학생이 두번째로 많아 목단강학교 버금으로 가는 학교였다. 유치원학생수도 제일 많을때(고봉기)는 200명까지 된단다. 우리는 그래도 이 학교에서 학생수에 대해선 신심이 생겼고 앞이 내다보였다.
교원대오건설에서도 인재전략에 능한 교장이였다. 각지 촌소나 작은 학교들이 수시로 무너지고 있는 현시점에서 김교장은 재능있는 교원들 을인차인차 이학교로 파오고 있었다. 연변작가협회회원이며 흑룡강성에서도 중견으로 활약상을 보이고있는 리창현시인부부도 김교장이 2년간의 노력으로 파왔던것이다. 지금 리창현선생은 학교11개반급에서 유일한 담임교원이자 유일한작가이다. 그는 이 학교의 교원, 학생에 대해 글을 써서 사회에 홍보하고있으며 자신도 많은 시와 수필을 문단에 발표하고있고 맡은바 사업도 착실히 잘해 김교장의 칭찬이 자자하다. 그의 부인은 학교출납원으로 일하는데 나젊고 부지런하여 역시 학교의 중견일군으로 활약하고 있단다.
이 학교에서는 학교운영에서 모든것을 점수제로 하고 있었는데 우리 신문에 문장을 발표하면 전국급신문에 발표되였다고 최고점수를 준단다. 교학도 마찬가지이다. 교학질이 높으면 점수가 올라가고 아무리 로교원이라도 교학질이 낮으면 그만큼 점수가 내려간단다. 지각, 조퇴, 결석 등이 모두 점수제로 되여있고 지어 학생이 문제생겨도 그 학생을 책임진 담임의 점수가 떨어진단다. 학기말에 가면 선진선거도 점수가 높낮음에 따라 자연히 알려진단다.
이 학교에서는 그 드바쁜 특색활동과 교학의 와중에도 신문이나 잡지구독에 대해 아주 착실하게 밀고나가고 있었다. 학교현관에 들어서면 제일 유표하게 보이는것이 신문잡지를 알뜰히 오려붙인 벽보란인데 거기에는 이 학교 학생들이 발표한 여러가지 쟝르의 문장들이 붙어있었다. 우리 소년보를 오려붙인것이 제일 수자가 많았다. 우리 신문구독수도 제일 많았다. 300여명학생에 200여명 학생이 우리 신문을 읽고있었다.
7.
열한명밖에 안남은 학교
10월 29일, 우리는 동경성쪽으로 차고삐를 돌렸다. 해빛이 호듯호듯 떨어지는 운동장에서 깔깔대며 뛰놀던 성동향중심소학교랑 우창소학교랑 그리고 발해소학교와 향수소학교랑 그냥 그 자리에 있을가?
우리 흑룡강취재팀은 이번 취재활동의 마지막역으로 녕안시동경성진성동향중심소학교를 찾았다 헌데 이 학교옛터는 이미 쑥밭으로 무성하고 학교는 다른데로 이사했는데 학생이 11명밖에 안되였다.
나의 눈앞에는 이 학교에 아직도 200여명 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던 10여년전 그 모습이 떠오른다.
그때 이 학교는 이상하게도 창문마다 널문을 해서 달았었는데 낮에는 광선때문에 널문을 열어젖히고 상학하고 저녁이면 널문을 꽁꽁닫아걸어놓고 있었다.
교장한테 원인을 물으니 저녁마다 술취한 사회청년들이 학교부근에 와서 돌총을 놓아 유리창을 다 마사버린단다. 아무런 리유도 없이 그저 재미로 그런단다.
조치를 대다못해 나중엔 창문마다 널문을 다는 방법아닌 방법을 찾아낸 것이란다
나는 그때 억이 막혔다. 널문을 단 교실남쪽창문과 북쪽창문을 세여보니 200여개나 되였다.
그때 운동장에는 또 옆의 목재가공공장에서 실어다놓은 통나무가 여기저기에 무져져 있어 아이들의 활동장소는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헌데 그 악렬한 환경속에서도 이악스레 공부하던 애들이 지금은 한명도 보이지 않는다
학교마당은 온통 쑥대밭이 되였고 교실들은 이미 다 헐망한대로 목재가공공장의 창고로 되여버렸다.
우리는 억이 막혔다. 학교소실속도가 이토록 빠를수가 있는가? 당시 이 학교부근 어느 촌소에서 교원사업을 했던 리창현선생도 우리와 동행했는데 그의 말에 의하면 우창소학교, 향수소학교랑은 이미 없어진지 오래고 발해소학교는 지금 학생이 40여명밖에 없는데 원래의 성동향중심소학교는 지금 11명학생밖에 없는데 오라지않아 역시 소실될거라고 했다. 그도 가슴이 아파 연신 한숨만 쉬는것이였다.
우리는 아쉬웁고 무거운 마음을 안은채 한때는 700여명학생이 왁짝 거렸다는 성동중심소학교옛터를 떠났다…
결속어
근 한달간의 산재지구교육현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직접 보고 피부로 느꼈고 귀로 들었다. 제일 가슴아픈건 우리민족학생래원이 점점 적어지고 학생수도 계속 줄어들고 있는 현상이였다. 하지만 우리는 또 산재지구의 학교를 살리려고 특색교학과 특색활동, 최고급교학설비와 교학방법의 도입 등으로 버티고 있는 민족교육사업일군들과 교원들이 있음으로 하여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리고 많은 곳의 학교들은 차츰 학생수가 상대적 온정성을 보이고 있으며 일부 학교는 여러가지방법과 수단의 과학적인 작용으로 학생수가 불어나고 있음도 발견하게 되였다.
우리가 제일 기쁘고 가슴뿌듯하게 느낀 점은 그래도 우리 민족교육현장에 아직도 수많은 민족혼을 가슴에 불태우고 있는 존경스런 교원들과 그들을 탄탄하게 묶어세우는 교장선생님들이 있다는 그것이였다. 그들은 많은 경우 무보수로동과 밤을 패고코피를 터뜨리는 로고로 높은 민족적 자각을 보이고 있는것이다. 이런 민족적 자각이 있기에 우리 민족교육 역시 그 미래가비참하지 않을것이고 이런 민족적 자각과 민족혼은 이 시대를 살아본 우리 민족사회와 앞으로의 우리 민족력사에 길이길이빛을 뿌릴것이다.
(2011년 12월 인터넷 길림신문에 발표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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